[특파원리포트] 정류장에 남긴 '전 재산 8엔'..日 여성 노숙인의 죽음


11월 16일 새벽 4시쯤, 일본 도쿄(東京) 시부야(渋谷)구의 한 버스 정류장에서 여성 노숙인이 숨졌습니다. 뒷머리에는 커다란 혹이 있었습니다. 사인은 외상에 의한 지주막하출혈, 뇌출혈의 일종입니다.

분명히 존재하면서도 잘 보이지 않는 노숙인이란 존재. 경찰이 피해 여성의 신원을 알아내기까지 꼬박 사흘이 걸렸습니다. 64살 오오바야시 미사코(大林三佐子) 씨였습니다.

일본 경찰이 11월 16일 여성 노숙인이 숨진 현장에서 조사를 벌이고 있다. 〈일본 NHK 방송 화면〉


22cm짜리 의자가 유일 안식처

오오바야시는 올해 2월까지 파견 근로자로 슈퍼마켓 시식 판매원으로 일했습니다. 결혼도 하지 않고, 아이도 없었습니다.

코로나19가 닥치자 고객과 얼굴을 마주하는 시식 판매대가 사라졌습니다. 많은 비정규직, 특히 여성들이 일자리를 잃었습니다. (*지난 7월, 일본 총무성 조사에서 여성 취업자는 전년 동기 대비 54만 명 감소, 남성 24만 명의 두 배가 넘었다)

오오바야시가 버스 정류장을 찾기 시작한 건 실직 2달 후부터입니다. 그녀는 주변에 폐를 끼치지 않도록 막차가 끊기는 새벽 2시쯤 나타나 첫차가 오는 5시쯤에는 정류장을 떠났다고 합니다. 의자 한 칸은 폭 40cm, 깊이 22cm. 쇠붙이 칸막이를 붙여놓아 몸을 누일 수조차 없습니다. 일부러 사람이 오래 머물지 못하도록 설계한 듯한 의자가 그녀의 유일한 안식처였습니다.

일본 경시청이 공개한 현장 CCTV 화면


“아프게 하면 사라질 줄 알았다”

현장 CCTV가 일본 방송에 나오자 나흘 만에 범인이 자수했습니다. 인근에 사는 46살 요시다 카즈토(吉田和人) 씨. 그는 경찰에서 "동네 자원봉사로 쓰레기를 줍고 있는데 노숙인이 눈에 거슬렸다. (범행) 전날 산책 도중 '돈을 줄 테니 버스 정류장에서 나가라'고 했는데 말을 듣지 않아 화가 났다. 아프게 하면 사라질 거로 생각했다"라고 진술했습니다.

사건 당일, 요시다는 버스 정류장에 웅크리고 있던 오오바야시를 또 만났습니다. 가지고 있던 비닐봉지 안 페트병으로는 부족하다고 여겼는지 돌을 채워 넣은 뒤 뒷머리를 내리쳤습니다. 그리고는 아무 일 없듯 왔던 길을 되돌아갔습니다. 그의 혐의는 상해치사. 경찰서로 이송된 요시다는 80대 노모에게 "엄마, 미안해. 이렇게 될 줄 몰랐어"라고 했습니다.

일본 언론을 보면 요시다는 중학교 때부터 '히키코모리'(ひきこもり·은둔형 외톨이) 성향을 보였습니다. 21살에 얻은 직장도 곧 그만뒀습니다. 이후 선술집을 하는 어머니를 도왔습니다. 외톨이 성향은 이웃과의 불화도 불렀습니다. 예컨대 이웃이 지붕에 TV 안테나를 새로 달면 "집 베란다에서 보이는 세계가 나의 전부이다. 경치가 바뀌니 화가 난다"면서 트집을 잡았다고 합니다.

요시다가 사는 건물 옥상에선 버스 정류장이 내려다보입니다. 요시다에게 어느 날 나타난 여성 노숙인은 자신만의 세계에 침범한, 그래서 치워버려야 할 '쓰레기'로 보였던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한 참가자가 12월 6일 여성 노숙인을 추모하기 위한 촛불집회에서 “생명을 죽이지 말고 살리라”는 내용을 손팻말을 들고 있다. 〈마이니치신문〉


스가 총리, ‘자조’(自助) 강조

일본의 제99대 총리가 된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총리가 9월 16일 취임 기자회견에서 특히 강조한 게 있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사회상은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는 '자조'(自助), 그것이 안 되면 지역 공동체와 함께 해결하는 '공조'(共助), 그것도 안 되면 국가나 지방공공단체가 나서는 '공조'(公助)라는 것입니다.

12월 6일 저녁, 시부야 요요기(代代木) 공원에서 오오바야시를 추모하는 촛불집회가 열렸습니다. 사건이 난 버스 정류장에서 차로 15분 떨어진 곳입니다.

마이크를 든 한 참가자는 "사건을 듣고 같은 세대의 여성으로서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그녀는 도움을 청하지 않고 '자조'로 계속 노력하다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것이 '자조'를 추구하는 사회의 결과입니다. 누구나 어려울 때 도와달라고 할 수 있는 '착한' 사회를 만들어야 합니다"라고 호소했습니다.

참가가 170여 명은 ‘그녀가 바로 나 자신’이라는 팻말을 들고 시부야의 밤거리를 돌았습니다.

스가 요시히데 일본 총리가 9월 16일 도쿄 총리관저에서 취임 후 첫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일본 교도통신〉


정류장에 놓인 꽃과 음료

고령화가 심각한 일본에선 여성의 빈곤율이 상대적으로 더 높습니다. 내각부의 '남녀 공동 참가 백서'(2012년 판)를 보면 고령 세대의 상대적 빈곤율은 22.8%이지만, 단신 여성 세대는 46.6%에 달합니다. 코로나19는 이 격차를 더 키우고 있습니다.

노숙인을 상대로 한 폭력의 무게감 역시 여성 쪽이 훨씬 클 수밖에 없습니다. 이게 오오바야시가 노숙인들이 많이 몰리는 공원이 아닌 버스 정류장을 찾은 이유일지도 모르겠습니다. (*2019년 일본 정부 조사에서 전국 노숙자의 수는 4천555명이었고, 이 가운데 여성 비율은 35%였다)

여성 노숙인이 숨진 버스 정류장에 놓인 꽃다발과 음료수들. 〈일본 NHK 방송 화면〉


"이런 데서 자면 몸 상한다"며 말을 건네오는 사람들에게 오오바야시는 늘 "괜찮다"라며 웃어 보였다는 목격담이 전해집니다. 저항 한 번 못하고 숨졌을 때 그녀 가방엔 전원이 들어오지 않는 휴대전화와 친척 연락처가 빼곡히 담긴 작은 메모가 들어 있었습니다. 주변 도움 없이 '자조'(自助)에 최선을 다했을 그녀가 남긴 돈은 8엔(약 80원)이 전부였습니다.

오오바야시가 생을 마감한 버스 정류장에는 오늘도 누군가 가져다 둔 꽃다발이 놓여 있었습니다. 유산균 음료와 과자 빵도 있었습니다. 슈퍼마켓에서 일하던 그녀가 밝은 표정으로 시식과 시음을 권하던 바로 그 상품입니다.

황현택 기자 (news1@kb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