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후자금 착취 리포트- 늙은 지갑을 탐하다] <2> 핏줄의 배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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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부동산 털린 고령층 급격히 증가
피해 알고도 가족 상대로 신고 꺼려
WHO “노인인구 6.8% 착취 경험”
금융위, 피해규모 제대로 파악 못해


‘동생이 무섭다. 자식에게 가고 싶다.’ 노인의 삐뚤빼뚤한 서체에서는 절박함이 묻어났다. 청각장애인 윤석진(73·가명)씨가 여동생 눈을 피해 써 내려간 문장이다. 그는 지난해 6월 납치당하듯 동생의 집으로 끌려갔다. 고령 탓에 인지·판단 능력이 떨어진 윤씨는 저항 한번 못하고 1년간 갇혀 지냈다. 동생은 지난해 12월 윤씨의 토지 800㎡를 자기 이름으로 옮겨 놨다. 1억 2000만원(공시지가 기준)짜리 땅은 윤씨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주인이 바뀌었다.

동생의 착취가 꼬리를 밟힌 건 지난 5월이었다. 동생은 오빠 윤씨를 데리고 서울 한 구청에 장애연금과 기초노령연금을 신청하러 갔는데 복지정책과 직원이 윤씨의 실종 접수 사실을 인지해 두 사람을 떼어놓았다. 이후 필담을 나눠 동생의 범행을 확인했다. 윤씨는 다시 자녀의 품으로 돌아갔고, 경찰은 동생을 감금과 노인 학대 혐의를 적용해 기소 의견으로 검찰에 송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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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씨가 겪은 ‘경제적 착취’의 비극은 힘없는 노인이라면 누구나 당할 수 있는 일이다. 인지·판단력이 떨어지면 착취의 대상이 되기 쉽다. 범인은 형제자매나 아들·딸, 며느리, 사위, 친척, 간병인 등 주로 노인 곁에 있는 이들이다. 일선 복지 현장에서는 7일 “가족 등에게 돈이나 부동산을 빼앗기는 고령층이 급격히 늘고 있다”고 밝혔다.

심각한 현장 분위기와 달리 정부는 경제적 착취의 실태를 제대로 파악조차 못 하고 있다. 노인보호전문기관이 지난해 접수하거나 상담한 피해 건수는 426건뿐이었다. 이 숫자가 현실을 온전히 반영한다고 믿는 전문가는 없다. 금융위원회도 고령층 금융 착취를 막겠다며 ‘노인금융피해방지법’ 제정을 추진하기로 했지만, 노인 피해자가 매년 몇 명쯤 되는지조차 알지 못한다. 강경훈 동국대 경영학과 교수는 “가해자가 가족이나 지인인 사례가 많다 보니 피해 본 노인이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는다”고 말했다. 실제 서울신문이 인터뷰한 착취 피해 노인들은 “자식이 가져간 돈을 갚을 것이라고 생각한다”거나 “늙은이를 돌봐 준 대가”, “내가 돈을 빼가라고 했다”며 가해자를 오히려 감쌌다. 딸이 명의를 도용해 대출받는 바람에 2000만원의 빚을 지게 된 한 할머니는 전화 인터뷰 도중 “내 새끼 흉보는 건 못하겠다”며 끊기도 했다.

보건복지부의 노인학대보고서에 따르면 경제적 학대 가해자는 아들(44.9%), 딸(12.2%), 배우자(11.5%) 등 친족인 경우가 10건 중 8건이었다. 이 때문에 ‘학대를 당해도 참는다’고 답한 비율이 36.3%나 됐다. 세계보건기구(WHO)는 노인인구의 약 6.8%가 경제적 착취를 겪고 있는 것으로 추산한다. 우리나라(노인인구 815만명)에 적용하면 55만명 정도가 착취 위험에 노출돼 있다는 얘기다.

제철웅 한양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급속한 고령화 속도나 부실한 예방체계 등을 감안하면 서둘러 대응 방안을 마련해야 할 때”라고 말했다.

          
특별취재팀 ikik@seoul.co.kr